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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북!/지식계발도 영차

지식 밖의 괴물,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by 종이도 잉크도 없는 북호더 2023. 10. 9.

책 정보: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 김은주 | 윌북

 

 

  저의 배드타임... 스토리는 아니고, 배드타임 필로소피입니다. 친구가 제 생각이 나서 샀다고 선물로 준 책인데, 이 책의 도입부는 언제 읽어도 매력적이에요.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그녀는 자신을 물고 있는 부리가 된다. 그리고
용수철 뚜껑 같은 자연은, 시간과 도덕을 담고
아직 쿨렁쿨렁한 그 납작한 트렁크에
이 모든 것을 채운다. 곰팡이 핀 오렌지 빛 꽃
여성용 약품들, 납작 누른 여우 머리와 난초꽃 장식 밑으로
흉측하게 튀어나온 보디세아의 젖가슴.

잘생긴 여자 두 명이, 도도하고, 날카롭고, 미묘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다.

-에이드리언 리치, 「며느리의 스냅 사진들」 중.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시작부터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시는 「문턱 너머 저편」에 수록된 연작시 「며느리의 스냅 사진들」 중 5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이에요. 1963년 페미니즘의 원형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유명한 시라고 하더라고요. 「며느리의 스냅 사진들」의 어조는 평이하고 다정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어투로 당시 여성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들, 사회적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여성, 자신을 상처 입힌 말로 다른 여성을 상처주는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죠.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도 그렇습니다. 철학의 역사는 오랫동안 남성들만의 것이었으며, 여성을 배제한 채 보편적인 인간을 이야기한 철학사에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 그들의 논리로 설명하지 못하는 타자인 여성을 괴물로 인지하고, 그것을 통해 지혜를 얻을 지언정 어둠 속에서 꺼내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요. 그렇게 오래간 여성은 타자로, 배척받는 괴물로 어두운 공간에 머물러야 했지만 그럼에도 철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성 또한 마찬가지로 지혜를 욕망하며 그렇기에 여성주의 철학도 보편 철학으로써의 입지를 유지하기를 희망하는 겁니다. 지금의 철학에서 '보편적'이라는 말은 허구에 불과하지만 기존 철학에서 암시적으로 배어있던 차별을 지적하고 수정하고자 하는 셈이죠.

 

  그러한 이유로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20세기 여성철학자 중 근대 주체를 비판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타자와 소수자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성찰하고, '즉시 이해할 수는 없는' 겸손한 지평에서 타자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에서 소개하는 여성 철학자는 총 6명입니다. 한나 아렌트, 가야트리 스피박, 주디스 버틀러, 도나 J. 해러웨이, 시몬 베유, 쥘리아 크리스테바 순으로 소개하죠.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이 사람의 대표 철학을 분석하고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배경에서 어떤 사고를 가지고 철학을 형성한 이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필로소피 랩>같은 간단하게 읽기 좋은, 대중적인 철학 입문서는 아니고요. 교양으로 철학에 엉덩이 좀 붙여봤다~ 싶은 사람을 위한 중급자용 같은 느낌이에요. 일대기를 설명하는 것만은 아니고, 책의 도입에 에이드리언 리치를 인용한 것처럼 사이사이 다른 소설도 인용해줍니다.

 

  예를 들어 스피박을 이야기 하기 전에 「제인 에어」의 버사 메이슨을 이야기 하고, 나아가 「광목한 사르가소 바다」의 앙투아네트를 이야기 합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 버사 메이슨은 사실 자메이카에서 나고 자란 혼혈인 앙투아네트 코즈웨이였어요. 로체스터는 그녀에게 매혹되었고, 앙투아네트는 '피부가 하얀 흑인의 혈통'이라는 이유로 양측에서 배척당했기에 타인의 이해가 간절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로체스터는 그에게 '버사'라는 영국식 이름을 주고 영국의 논리에 따를 것을 요구했지만, 앙투아네트가 신비함을 잃자 로체스터의 흥미는 식어버립니다. 로체스터가 매혹된 건 신비롭고 불가해한, 무관심하고 아름다운 코즈웨이였지 영국의 귀부인이 아니었거든요. 앙투아네트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다락방에 갇혀 미친 여자로 남게 되는 게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줄거리죠.

 

  사르가소는 버뮤다 삼각지대에 위치한 바다로, 많은 배의 앞길을 막아섭니다. 여기에서 스피박은 사르가소에 백인 남성이 가두어버린 앙투아네트의 광기어린 목소리를 떠올렸고, 진 리스의 소설에 매료되었다는 설명으로 스피박 철학에 대한 흥미를 이끌어냅니다. 서구 문명과 대립하는 비서구의 야만으로 그려진 버사 메이슨이 이야기 할 수 없었던 진실, '앙투아네트 코즈웨이'와 서구 주체가 타자에게 가진 인식의 폭력성에 대해서요. 저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꽤나 재미있게 읽었기에 스피박 파트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답니다. 

 

  인용이 많아서 '이 많은 책을 다 알고 이해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겠지만, 전부 이해할 필요는 없더라고요. 애초에 그만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서양철학이다 보니 평소에 자주 접하지 못한 언론인도 등장하고... 또 '그러려니'하고 읽다 보면 이해는 됩니다. 다만 한 번에 이해하기는 힘들고 어쩔 수 없이 다회독을 권장하기는 해요. 두툼하지는 않지만 철학 용어에 대한 지식이 좀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위키와 인터넷을 끼고 보게 됩니다.

 

  그렇게 자료조사의 늪으로 빠지기에... 저도 이 책을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지는 못해요. 그렇게 두껍지도 않은데 말이죠. 의도는 좋은데 수상하게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철학자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 이상은 말이죠. 

 

  최근 화제가 된 레즈비언 부부의 임신 소식에 대해서 생활동반자법 통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동훈 장관은 이에 대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주디스 버틀러는 이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일을 피하려 한다'고 답변해 화제에 불을 붙였죠.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가부장제와 임신중지', '젠더와 가정', '트랜스젠더 여성 운동선수' 등등 많은 문답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 문답을 제대로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주디스 버틀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각으로 무슨 활동을 해왔는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죠. 그렇다면 '젠더 트러블'과 '자율성을 위한 투쟁'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젠더 트러블이야 유명하지만 두꺼운 책을 전부 읽기에는 시간과 여력이 마땅치 않습니다. 

 

  저는 이 사이에 놓기 좋은 책이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라고 봐요. <필로소피 랩>은 '이런 철학을 분명 누가 뭐라고 불렀을거야...'하고 간단히 읽기 좋은 책이고요.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는 '이 사람에 대해 간략하게 알고 싶다. 요약본이 필요하다.'할 때 읽기 좋습니다. 본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잠깐 소개해주는 중간다리 역할일까요.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여성주의 철학은 가부장제의 반담론이 아니며, 타자와 소수자는 연대하여 '다같이' 변화하기를 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참고할만한 철학자를 하나하나 길목에 내려놓고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하는 셈입니다. '내가 느낀 고통', '나의 슬픔'에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서사에서 벗어나 의미있는 실천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저자의 목적입니다.

 

  저는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를 읽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떠올렸어요. 사람의 아름다운 부분을 모아 만들었고, 고풍스러운 어투를 구사하며 지식과 교양을 쌓았지만 흉측한 외모를 가져 '일반적인' 사람들 사이에는 섞일 수 없었던 크리처를요. 그의 복수는 창조주에 대한 반항으로 이어졌고, 타인의 이해를 구걸하기에 짝을 찾았지만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둘이나 만들 수 없어 거부합니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의 도입부를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프랑켄슈타인이더라고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여성의 이야기였다면...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물론 미친 여자라서 좋은 것도 있고요.

 

  좋은 취지의 좋은 책이고, 많은 담론을 제시하고는 있습니다만 정말 어쩔 수 없이 불친절 합니다. '최대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는 있는데...' 많이 아는 분이 적당히 아는 사람에게 소개하려고 했다!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게다가 편집이 양쪽 정렬이 아니라서 보기에 눈이 조금 피로합니다. 읽다보면 괜찮은데 나중에 은근히 신경쓰이더라고요. 

 

 

이 책을 꼭! 한 번은 눈여겨 봐주시길.

철학자에 대한 흥미는 있다. 그런데 시간은 없는 분, 교양 철학을 스탭업 하고 싶은 분, 젠더 이슈에 흥미가 있으신 분

 

이 책은 아직 일러요!

당장 철학을 시작하시는 분(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헷갈리고 재미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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