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보: 라틴어 수업 | 한동일 | 흐름출판
어릴 때 도서관에서 책 좀 읽어봤다 하는 친구들에게는 수상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사어(死語)같은 마이너한 언어에 수상할 정도로 집착을 보인다는 거예요. 작게는 고대 라틴어, 히브리어부터 시작해서 게일어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수입에 상관없이 직업을 고를 수 있었다면 저는 아마 게일어를 연구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홍은영 선생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다리다가 켈트 신화로 급커브 해버렸거든요. 크롬 크루어히에 관한 전승이 너무너무 흥미로워서 제대로 언어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품었답니다. 심지어 그 때에는 마비노기를 하지도 않았는데도요.
이렇게 수상하고 마이너한 언어에 집착하는 애들은 자라서 99%의 확률로 인문학도가 됩니다. 그리고 교양으로 어문 강의를 신청해서 듣다가 '흐아아악 내가 바란 건 이게 아니었던 듯.'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대충 8~90%쯤 되고요. 마이너한 언어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돌아오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어이면서 인기가 고공행진하는 언어는 있습니다. 라틴어요. 토스카나 어로 쓰인 신곡의 서문을 읽으면서, 생전 고인의 개쩌는 라틴어 시를 읽으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간지난다고 생각하지 않던가요. 라틴어를 배우는 사람 중에 라틴어로 '창문 좀 열어주세요'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드물답니다. 대부분 '필멸자는 항상 지혜로울 수는 없다' 같은 걸 하고 싶어하죠.
그런 의미에서 라틴어를 찍먹하기에 '라틴어 수업'은 가장 찍먹하기 쉬운 라틴어 교재입니다. 잠시 예문을 좀 볼까요.
Non tam praeclarum est scire Latinum quam turpe necire.
논 탐 프래클라룸 에스트 쉬레 라티눔 쾀 투르페 네쉬레.
라틴어를 모르는 것이 추하지 않은 만큼 라틴어를 아는 것도 고상하지 않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저술가로 라틴어의 대가로 불리는 키케로가 한 말입니다. 그는 더 나아가 '지긋지긋한 라틴 문학'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라틴어가 공용어였던 로마 제국에서조차 이 언어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모르는 것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편견은 그때에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 당시에는 로마 제국의 확장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라틴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라틴어에 대한 문맹률이 더 높았습니다. 즉 라틴어를 잘 익히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를 왜 잘 배우지 못했을까요?
이후로 이어지는 페이지를 요약하자면 '당시 사람도 헤매던 거 네가 모르는 거 당연해! 심지어는 다빈치도 헤맸어!'하고 다독이는 말과 라틴어의 수학적이고 조직적인 측면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시 이런 사람이 진또배기 언어학자를 하는 거겠죠.
사실 외국어를 빨리 익히는 방법 중 하나는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호기심과 애정을 갖는 겁니다. 좋아하면 더 빨리 잘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라틴어를 공부할 때 유럽 사회의 학문과 문화의 다채로운 면모를 발견하면서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해소해나갈 수 있었고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라틴 문학이나 라틴어와 연관된 학문을 한다면 라틴어의 문법을 철저히 공부해야 하지만 교양 수준으로 배우는 학생들까지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비단 라틴어 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에도 해당되는 말이라, 공감이 깊게 되어서 인용해온 말이랍니다. 질풍노도의 오타쿠 시절-지금이 오타쿠가 아니라는 게 아니라, 시들시들한 오타쿠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뭐라고 하는지 알고 싶다고 무턱대고 일본어를 공부하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참 맞는 말이에요. 언어에 호기심이 생기는 건 그 나라의 문화나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더 잘 알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 공부를 택하는 건데 말이에요. 문법이니 어조사니 하는 것들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흥미는 멀어지고 의무만 남아서 순식간에 언어가 재미없어지더라고요. 이 인용은 훔쳐서 제 일기장에 박아두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에 들어서요.
이 라틴어 수업을 읽어보면, 소위 말하는 '짬'이 느껴집니다. 강의를 많이 해본 교수님이 '있어 보이려고' 라틴어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여러 번 해본 것이 느껴져요. 라틴어의 어떤 점이 매력적인지, 어떻게 다가가야 외우기 쉬운지 아주 차근차근 알려준답니다. 라틴어를 배우기 위한 수업이라기 보다는 라틴어의 매력을 알기 위한 수업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라틴어를 '잘'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라틴어를 '배우면서' 라틴어가 주 언어였던 시대도 사랑할 수 있게끔 부연설명을 넣어준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교수님, 진짜 라틴어를 사랑하나보다....... 뉴비 영업글을 되게 자세하고 다정하게 쓰시네.'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베아티투도beatitudo'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행복'을 뜻하는 단어인데 '베오beo'라는 동사와 '아티투도attitudo'라는 명사의 합성어입니다. 여기에서 '베오'는 복되게 하다, 행복하게 하다'라는 의미이고 '아티투도'는 태도나 자세,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즉 '베아티투도'라는 단어는 '태도나 마음가짐에 따라 복을 가져올 수 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행복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에는 여러 가지 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 단어가 유독 마음에 남는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 때문입니다.
저, 아주 이런 것에 환장합니다. 어원을 파헤쳐서 의미를 알아내고, 그 각각의 단어가 결합되어 새로운 뜻을 만들어낸다? 굿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정하기까지 하다? 아름답다, 경이롭다, 훌륭하다, 완벽하다, 세상에 다시 없을 다정함, 최고 된다. 박수치고 발로 박수치고 엉덩이로 박수치고 배꼽으로 박수칩니다. 가만히, 조심조심 읽어보니 제가 일기장에 훔쳐갈 맥락들이 아주 차고 넘치는 책이더라고요 이거. 오랜만에 독서로 포식하는 느낌이 들어서 무척이나 흡족했습니다.
라틴어 수업의 한 가지 단점이라고 한다면, 교수님이 너무 교양이 넘치는 바람에 배경지식이 없으면 우? 하고 넘어가게 되는 설명이 있다는 것 정도 입니다. 신약성서 루카 복음의 인용이라던지, 로마의 생활 상이라던지, 역사라던지. 세밀하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만한 일들이 배경지식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가끔은 그걸로 농담도 하시니 대충 겉핡기로만 아는 독자로서는 '호오... 그렇군요.'하고 넘어가는 일이 꽤 잦습니다. 좋은 교수님이지만, 어쩔 수 없는 교수님이라는 거겠죠.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사람!
라틴어를 간지난다고 생각해본 적 있는 사람, 중2병 세게 겪었던 오타쿠, 로마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이런 분께는 별로일 것 같네요.
수학과 몇 광년 쯤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 한국어만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사람, 로마를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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